아름다운 텍스트는 발음되기도 전에 들린다. 그것이 문학이다. 아름다운 악보는 연주되기도 전에 들린다. 그것이 미리 준비된 서양 음암의 찬란함이다. 음악의 원천은 소리의 생산에 있지 않다. 그것은 듣기라는 절대 행위 안에 있다. 창조 행위에서 이 절대 행위는 소리의 생산에 선행한다. 작곡이라는 행위가 이미 그것을 듣고, 그것으로 작곡을 한다. 연주가 이미 들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듣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솟아오르게 한다. 그것은 의미하기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드러내기도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듣기이다.
-
동양의 음악가들은 기호(글자나 음표)의 주위보다는 옛날의 주변을 더 배회한다. 그들은 억제된 것의 주변,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때 육체 안에 기억된 흔적의 주변을 배회하고, 마치 샤먼이 자신의 여행과 꿈의 방향을 바꾸고 불러내는 것처럼, 변주하고 떠돈다. 유럽의 음악가는 꿈을 꾸고 난 후에 잠이 깨서 그 꿈을 이야기하는 샤먼이다. 흡사 신분을 감춘 오디세우스와도 같다. 우디세우스는, 그의 생전에 불가능한 귀향 -마치 오디세우스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쓴-을 음유 시인이 그의 면전에서 읊고 있을 떄, 겉옷 자락을 머리에 뒤집어 쓰고 페아키아 왕의 궁전에서 흐느낀다.
/은밀한 생 p60, p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