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삶에 대해 그토록 무심하려 했으나 그렇게 보이고 싶어했던 배 이상으로 간절했다. 꿋꿋해지자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받아내듯이 말한 것도 나의 연약함에 진절머리가 낫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온갖 두려움들이 겹쳐져 그것들이 내 살갗이 될까봐 그것또한 겁이 났다. 삶에 소망과 희망이 가득하길 원하는 것은 아니였다. 다만 내가 살지 않은 시간의 그곳에는 그러한 내가 있어야 하는데로 끝나는 명확하지 않은 꿈 속과 같은 이미지의 연속 때문에. 반드시 그럴 것이다라고 온전히 나를 믿지 못하고 나의 삶마저 의구심을 품는 나때문에, 그 미래에 내가 그토록 경멸하던 인간이 되어있을까봐. 두려움이 다시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스스로에 대한 생각과 나를 풀어내고 해석해야 하는 날들을 지나고, 나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고. 타인과 나에 대해 명확히 선을 그을 즈음에 나는 어떠한 인간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21살때 이러한 생각을 왜 하느냐의 질문을 또래의 여자에게서 받았을 때는 그 질문이 꽤나 신선했다. 모든 인간이 스스로에게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답을 내릴 것이라는 것에 대해 당연시 했었던 것 같다. 이것과 관련된 질문은 그 나이때 그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러한 오류를 가졌으리라. 결국 그 질문에 나는 너는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느냐 되묻는 것으로 끝났지만. 아직도 그 날의 놀라움이 생생하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말로 행동으로 알려줬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 이도 있다는 것을.
나는 계속해서 나를 알려고 하는 집착을 줄이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받고 싶어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내 그에게 온갖 것들을 바치는 여자처럼. 나는 내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더욱 집착했으며. 옳다고 생각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믿음으로 보상했고,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에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리곤 어떠한 것을 더 사랑하는지, 더 원하는지에 대해 끊임이 없었고, 구미에 맞는 것들만 고르고 엄선해 눈으로, 입으로, 귀로 넣어주었다. 그것은 소유할 수 있는 사물뿐 아니라 의식과 사고와 감정에 제공할 수 있는 요소들, 그리고 사람까지. 나 스스로의 관찰은 나에 대한 사랑이 아닌 에고의 집착정도라 생각한다. 나 스스로가 풍부해짐을 원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채우기에 나는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에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삶 중에서.
현재에 원하는 것을 다 채우지도 못했는데, 더 미래의 그림까지 뻗쳐간다. 원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라 나를 달랜다. 엄마가 아이를 달래듯. 스스로를 토닥인다.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을 바란다고 읊는것이 중요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의지를 단단히 여미고, 원하는 것에 흔들림이 없도록 바램을 굳혀놔야 한다. 요즘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요구한다. 믿어라, 견뎌라, 계속해서 나아가라, 앞으로 걸어가자. 이제는 내 삶을 그토록 원하고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값지다고 생각하는 그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진 삶으로 충만하길.
오랜만에 긴글이다. 오늘 꽤나 솔직함으로 털어버리며 안정을 되찾는다. 내가 어느 시간에 있든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것이 내 삶이 되길. 가치의 우선순위에 좀 더 명확해지길. 옳은 것을 행하는 사람이 되길. 견디며 나아가는 사람이 되길. 그것이 홀로일지라도.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길. 그것이 무엇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