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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논할 때 누구나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제안하지 않겠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의 생물체나 그림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의도한다면, 직선과 원으로 이루어지고 직선자나 삼각자로 만들 수 있는 평면 도형이나 입체 도형 등에 관해서는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들이 다른 것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형태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에, 자극에 의한 쾌락이 아니라 고유한 즐거움을 내재하고 있기 떄문입니다. / 플라톤 미학적 기능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세상과 사물에 대한 단순한 표면 장식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며, 주변을 둘러싼 현실을 반영해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현실에 적극적인 작용..

z 201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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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을 가두던 노란 스탠드 불빛아래 온통 타버려 형태도 알 수 없는 재를 모아두듯 그것들에 의존하여 모르는 인간의 표정을 나는 적었다. 버려진 말들과 적자마자 죽어버린 말들과 죽어도 죽지않은 말들을 모아두고서, 나는 도무지 멈출 수 없었던 칠흑과 다르지 않게 느껴지던 잠시이자 종착으로 믿게 되던, 그러니까 몸으로 굴려가며 아니고 싶었던 눈 멀고 환한 그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그 심정과 절망을, 훈장처럼 달고서 온 길을 걸었다. 나는 아주 먼길까지 달릴 수 있었고, 그것은 바람이었다 더 없이 높고 거친 산이었다. 그곳에 위협하듯 자라나고 있던 나무들이었다. 그러니 어떻해야 나는 이것들을 다 쓸 수 있을까. 나는 언제나 이 모름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토록 뻔한, 유희경

z 2014.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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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울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있다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퍼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비망록, 문정희

z 201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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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젊은 시절에도 나는 젊지 않았어 때때로 날은 흐리고 저녁이면 쓸쓸한 어둠뿐이었지 짐 실은 소처럼 숨을 헐떡였어 그 무게의 이름이 삶이라는 것을 알 뿐 아침을 음악으로 열어보아도 사냥꾼처럼 쫓고 쫓기다 하루가 가고 그 끝 어디에도 멧돼지는 없었어 생각하니 나를 낳은건 어머니가 아니었는지도 몰라 어머니가 생명과 함께 알 수 없는 검은 씨앗을 주실 줄은 몰랐어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젊은 시절에도 늘 펄펄 끓는 슬픔이 있었어 슬픔을 발로 차며 거리를 쏘다녔어 그 푸르고 싱싱한 순간을 함부로 돌멩이처럼 기억, 문정희

z 201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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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당신으로부터 사라지는 상상을 하는 나는 불편한 사람 불난 계절을 막 진입하고도 폭발을 멈추지 않는 사람 강의 좌안과 우안에 발을 걸치고 서서 그래도 계속해서 앞으로 가야 할 이유는 더듬는 사람 시간의 주름들 둘러쓰고도 비를 맞으며 독이 생기는 나는 누군가에게 불편한 사람 달팽이의 껍데기에 불과한 사람 그림자 모두를 타이르기엔 늦은 저녁 어쩌면 간절히 어느 멀리 멀리서 살기위해 돌고 돌다 나를 마주치더라도 나는 나여서 불편한 사람 가끔 당신으로부터 사라지려는 수작을 부리는 나는 당신 한 사람으로부터 진동을 배우려는 사람 그리하여 그 자장으로 지구의 벽 하나를 멍들이는 사람 진동하는 사람. 이병률

z 201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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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럿이 아니라 하나 나무이파리처럼 한 몸에 돋은 수백 수천이 아니라 하나 파도처럼 하루에도 몇 백년을 출렁이는 울컥임이 아니라 단 하나 하나여서 뭐가 많이 잡힐 것도 같은 한밤 중에 그 많은 하나여서 여전히 한 몸 가누지 못하는 하나 한 그릇보다 많은 밥그릇을 비우고 싶어하고 한 사람보다 많은 사람에 관련하고 싶은 하나가 하나를 짊어진 하나 얼얼하게 버려진, 깊은 밤엔 누구나 완전히 하나 가볍고 여리어 할 말로 몸을 이루는 하나 오래 혼자일 것이므로 비로소 영원히 스며드는 하나 스스로 닫아걸고 스스로를 마시는 그리하여 만년설 덮인 산맥으로 융기하여 이내 녹아내리는 하나 혼자. 이병률

z 201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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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나는 스무 살이었고, 사상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믿었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느끼며 묘하게 아파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자신감은 어떤 문제를 만나기 무섭게 사라져 버렸고, 실제 현실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무능은 나를 절망에 빠뜨렸던 것이다. 나는 음울하고 부박하며 외모는 단조롭고, 그러면서 고집스럽고, 경멸을 할 때는 극단적으로 경멸하고 또 감동할 때는 무조건 감동하고, 밑도 끝도 없이 쉽게 인상을 받고, 더구나 어느 누구도 내 의견을 바꾸어 놓지 못했던 것이다. 유레카에 관하여, 폴 발레리

z 2013.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