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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나엘이여, 공감이 아니고 사랑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네 마음의 시선 속에 있어야 한다. 행동의 선악을 판단하려 하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 선이나 악에 마음 두지 말고 사랑하는 것이다. 나타나엘이여, 나는 네게 열정을 가르쳐주마. 편안한 나날을 보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비장한 삶을 택하라. 나는 죽어 잠드는 휴식 이외의 어떠한 휴식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살아서 못 다한 젊음의 열망이 내 죽음 이후에까지 남아서 나를 괴롭히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내 속에서 원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이 땅위에 털어놓고 나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빈 몸의 완전한 절망 속에서 죽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러나 나타나엘이여, 동정이 아니고 사랑이어야 한다. 너의 순수한 열정은 소유에 있지 않다. 인생에는 다른 사람이 그대..

z 2011.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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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밀며 나는 우주로 간다 땅 속에 있던 지하 방들이 하나 둘 떠올라 풍선처럼 날아가기 시작하고 밤마다 우주의 바깥까지 날아가는 방은 외롭다 사람들아 배가 고프다 인간의 수많은 움막을 싣고 지구는 우주 속에 둥둥 날고 있다 그런 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편지를 쓰는 일은 자신의 분홍을 밀랍하는 일이다 불씨가 제 정신을 떠돌며 떨고 있듯 북극의 냄새를 풍기며 입술을 떠나는 휘파람, 가슴에 몇천 평을 더 가꿀 수도 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이, 이 세상을 희롱하는 방법은, 외로워해주는 것이다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사랑이다 아버지는 병든 어머니를 평생 등 뒤에서만 안고..

z 2010.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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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눈이 너로 인해 번식하고 있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불가피하게 너를 사랑해서 내 뒤편엔 무시무시한 침묵이 놓일 테지만 너를 사랑해서 오늘은 불가피하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영혼에 처벌받을지 모르지만 시체를 사랑해서 묻지 못하는 사제처럼 불가능한 영혼을 꿈꾼다 환영에 습격받는 자로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몇천년 전부터 살았던 바람이 내 머리칼을 멀리 데리고 날아갈 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김경주

z 2010.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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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어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보다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긍지의 날(1995.2)/ 김수영

z 201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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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항상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지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맞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z 201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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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사랑법 / 강은교

z 2010.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