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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언어는 더 이상 빛이 아니다. 언어는 단순한 조명에 불과하다. 언어는 빛 아래를 파고들어가지만, 어디로 향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소리만이 있으며, 말들은 서로 충돌하기만 한다. 소리가 빛을 대신한다. 파괴된 말, 말들이 만드는 소리는 그을음처럼, 빛 없이 불안하게 펄럭거린다. 축축하게 젖은 지푸라기가 타듯이, 하나의 소리에서 다른 소리로 옮겨붙는다. 불꽃도 없이 연기를 피운디.

z 201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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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치마를 마당에 벗어놓고 사라진 날 나는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이상한 나라의 미소를 알아본다 처음으로 엄마가 남의 집 대문을 몰래 따고 있을 때 그 집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요 나는 엄마를 백일째 기다리다가 싱크대 밑으로 들어가 녹아버린 눈 같아요 엄마가 눈 위에 오줌을 눈다 얘야 날 왜 지붕위로 데려왔니? 여긴 엄마의 흰 머리캉이 하늘로 다 날아날 때까지 바람이 부니까요 눈이 내리면 나는 노트`위에 물을 그려요 누구의 일부라도 될 수 있는 물을 그런 말 마라 네 몸엔 분명 내 몸의 일부만 흐르고 있다 오랜만에 한 베개에 나란히 누우니 좋다 그런데 얘야 네 흰 머리칼 냄새 때문에 도무지 잠을 못 자겠구나 슬픔이 조금 모자라도 길게 이어진다 당신의 치마 속으로 들어간 수십만 그루의 촛불..

z 201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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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환절기 박준

z 201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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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의 먼 햇살 속으로 걸어간다 죽음은 미소로 아이들을 정지시킨다 시간과 시간 사이에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증인이 아니다 눈을 가린 말들이 내뿜는 진흙 같은 입김 얼어붙은 눈알을 녹이는 얼어붙은 입술 조 패스의 기타를 닮은 심장들의 리듬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제의 집 일요일 아침의 먼 햇살 속으로 걸어간다 아이들은 미소로 죽음을 정지시킨다. 어제의 집 김홍중

z 201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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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네" 하며 처창한 낯빛으로 나에게 말하던 그때의 그 말을 나는 오늘까지도 기억하여 새롭거니와 과연 그 후와 나는 M군의 그 말과 같이 내가 생각던 바 그러한 것과 같은 세상은 어느 한 모도 찾아 낼 수는 없어 모두가 돌연적이었고 모두가 우연적이었고 모두가 숙명적일 뿐이었다. "저들은 어찌하여 나의 생각하는 바를 이해하여주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해야 옳다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저들은 저렇게 생각하여 옳다 하는 것일까."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은 하여볼 겨를도 없이 "세상이란 그런 것이야. 네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것, 때로는 정반대되는것. 그것이 세상이라는 것이야!" 이러한 결정적 해답이 오직 질풍신뢰적으로 나의 아무 청산도 주관도 없는 사랑을 일..

z 2014.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