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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생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용서받고 싶은 일들이 하나둘 떠오르고뱉어내는 말보다 주워 삼키는 말들이 많아졌다 삶이 낡았다는 생각이 들자 내 몸에 새겨진 흉터가몇 개인지 세어보는 일이 잦아졌다반성할 기억들의 목록이었다 뼈에 든 바람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두려웠고계절이 몇 차례 지나도록 아직 이겨내지 못했다 사소한 서러움 같은 것이 자꾸 눈에 밟히지만아무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했다 바싹 여윈 등뼈가 아름다웠던 사랑이 떠난여름 이후  여름 이후 ,  이종형

z 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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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결국 우리가 엮어 놓은 기억뿐이다. 각자 자기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한 빛깔을 고른다. 나는 백금 사진의 영구적인 선명함을 고르고 싶다. 그러나 내 운명에는 그런 빛나는 구석이 조금도 없다. 나는 모호한 색깔들과 불분명한 미스터리, 불확실성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인생의 이야기는 세피아빛 초상의 색조를 띤다

z 202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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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이 아름다움이란 대상에 부여된 속성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주체의 판단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펼칠 때—“그냥 네가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잖아?”—우리는 타자의 판단을 감히 교정하려고 들지 말라는 모종의 도덕 명령을 떠올려볼 수 있다. 흄은 이 지점을 좀 더 명확히 한다. 아름다움은 사물들 자체 안에 존재하는 성질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사물들을 관찰하는 정신 안에만 존재하며, 각각의 정신은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지각한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곳에서 다른 사람은 추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모든 개인은 주제넘게 다른 사람들의 정감을 통제하려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정감만을 묵묵히 따라야 한다. 실재하는 아름다움이나 실재하는 추함을 발견하려는 것은 실재하는 단맛이나 실재하는 쓴맛을 주제넘게..

z 202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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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 볼 일이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 있다.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 있으며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의 본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z 2022.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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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그들의 고난에 대해 느끼는 슬픈만큼이나 진지하며, 그들의 비참함에 대해 대해 느끼는 우리의 동료감정은 그들의 행복에 대해 느끼는 동료만큼이나 실질적이다 고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의 예리하고 섬세한 식별력이 바로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미세하고 거의 지각할 수 없는 차이를 구별해낸다 고상한 취미와 훌륭한 판단력이 찬사와 감탄을 받을 만한 자질로 생각될 때에는 흔히 볼 수 없는 감정의 섬세함과 이해력의 날카로움울 의미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것처럼, 예민한 감수성과 자기통제의 덕성도 통상적인 정도에 있지 않고 비상한 정도로 그러한 자질을 지닌 점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애와 같은 호감을 주는 덕성은 교양이 없는 보통 사람이 가지는 정도를 초월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확실하..

z 2022.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