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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들이 크고 작은 숲에서 종족이나 가족을 이루어 사는 것을 보면 나는 경배심이 든다. 그들이 홀로 서 있으면 더 큰 경배심이 생긴다. 그들은 고독한 사람들 같다. 어떤 약점 때문에 슬그머니 도망친 은둔자가 아니라 베토벤이나 니체처럼 스스로를 고립시킨 위대한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이들의 우듬지에서는 세계가 속삭이고 뿌리는 무한성에 들어가 있다. 다만 그들은 거기 빠져들어 자신을 잃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오로지 한가지만 추구한다. 자기 안에 깃든 본연의 법칙을 실현하는 일, 즉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만 힘쓴다. 강하고 아름다운 나무보다 더 거룩하고 모범이 되는 것은 없다. _ 나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는 나무가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

z 202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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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고작 글씨로 채워져 있는 종이 뭉치에 푹 빠져서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소비하고, 어떤 사람들은 유치한 영화를 보면서 열광하고 심지어 장난감까지 수집합니다. 잔디밭에서 22명이 작은 공 하나를 차려고 발버둥 치는 행위에 수십억 명이 열광하고, 매일 저녁 TV 앞에 모여 앉아 눈물을 훔치기도 하죠. 퇴근 시간은 아직 멀었는데 벌써부터 시계를 보고, 나를 사랑하는지 확신조차 없는 사람을 위해 선물을 고민합니다. 이 중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어요. 이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총합을 우리는 삶이라 부릅니다. 그러니 떳떳하게 원하는 곳에 애정을 쏟으세요. 그것이 삶을 합리적으로 만들어 주진 못해도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으니까요.

z 2021.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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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 밤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된다 나..

z 2018.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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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녁 무렵 때론 전생의 사랑이 묽게 떠오르고 지금의 내게 수련꽃 주소를 옮겨 놓은 누군가가 자꾸 울먹이고 내가 들어갈 때 나가는 당신 뒷모습이 보이고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기다렸다 하고 2 위 페이지만 오려 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 나뭇잎과 뱀그물, 뱀그물과 거미줄, 거미줄과 눈동자, 혹은 구름과 모래들, 서로 무늬를 빚지거나 기대듯 지독한 배신밖에는 때로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 3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 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z 2018.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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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그렇게 힘든 작업은 아니다, 내 생각엔 -감히 말하건데- 얼굴을 바로 떼어 놓고 바라보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즉 얼굴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것들을 치워 버리고, 얼굴과 그 나머지 것들이 서로 뒤섞여 얼굴 이외의 점점 더 모호한 의미로 한없이 달아나 버리려는 것을 시선(주의력)으로 제어할 수 있다면, 혹은 하나의 얼굴을 세상과 단절시켜 바라 볼 수 있는 고독을 가질 수 있다면, 그 때 이 얼굴 위로 -혹은 이 사람, 이 존재 또는 이 형상으로- 모여들어 중첩되는 것이 얼굴의 유일한 의미이다. 얼굴에 대한 미학적 인식을 가지려면 역사적 인식을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각각의 대상은 무한한 자기의 공간을 창출한다. -사람은 그 추함이나 악의를 넘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이 사실은..

z 2018.01.28